그 때 그 시각 그 벌판에서

내가 거의 두달전 떠나온 그 곳이 순간순간 생각날 때가 있다.

그 순간, 그 장소.
의 마법이란 게 있어, 그건 '그 순간, 그 장소'라는 시공간 속의 한 점은 절대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이란 거다. 떠나온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 있더라도, 거긴 이미 내가 있던 그곳이 아닌 거다. 내가 알던 좋은 사람들이 떠올라 그들을 억지로 만나게 되더라도 그 사람도 나도 그 때 그 시절, 당신과 내가 아닌게 된다. 이 걸 깨달은 몇년 전에 일기에 남겨두었는데, 그 후로 그 걸 읽을 때나 그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무언가 깊게 아쉬워지곤 한다.

오늘 문득 떠오른 건 하비베이에서 에얼리 비치 사이를 이동할 때의 그 마법같은 밤이다.
꽤 먼 거리였고 12시간 정도를 달렸던 거 같다. 저녁부터 그 다음날 새벽까지.
그 밤시간을 이동할 때 락햄턴 부근이었는지 어디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1777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내려 주기위해 도로위에 버스가 잠시 섰다.
12시였나, 혹은 두시였나. 자기에 불편한 차안에서 졸고 있다가 버시가 잠시 섰길래 바람이나 쐴겸 내렸다.
자동차 헤드라잇을 제외하곤 그 어떤 불빛 하나 없는 암흑천지, 깡시골의 2차선 도로 위였다. 가로등도 건물도 집도 없었다.
버스 발판에서 내려서 대륙의 차가운 밤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가, 옷깃을 잡고 깜깜한 길 가로 몇발짝 걸은 후, 숨을 한번 내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때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숨막히는 우주. 그 때 그 순간의 벅차오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하고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가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있는데 그건,
초등학교때 '은하수'라는 것을 배울때 당신들은 그걸 믿었느냐하는 것이다. 어떤 문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기억으로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에 써있는 은하수에 대한 요지는 '여름 밤하늘을 길게 가로지는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게 마치 강의 흐름 같아서 은하수라고 부른다고 했다. 공기가 오염되어 도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도 하더라. 어린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여름 밤하늘이건 겨울 밤하늘이건, 도시밤하늘이건 외할머니집의 시골 밤하늘이건 나는 수없이 많은 밤에 하늘을 보아왔는데 별의 강은 커녕 교과서에서 본 별자리조차 제대로 없었다.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결국에는 은하수는 커가면서 '그럴수도 있겠다, 있긴 한데 지금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건가보다'라고 이해(?)하게 되었고 그저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버리게 되었지만, 좀 더 자란 후 과학시간에 배운 성운이니 성단이니 하는 따위의 것들은 진짜로 믿지 않았다. 그 매혹적인 색깔로 어둠속에서 마치 조명쇼를 하고 있는 듯한 성운의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무지하게 외웠던 것도 같다. 말머리 성운, 무슨 성운하면서. 근데 그런 환상적 광경을 실제로 본 사람이나 있을지 나는 진짜로 궁금했다. 그리고 스스로 결론 내리기를 이런 형상들이 우주망원경으로 우주를 비췄을 때 찍히기는 할 테지만 뭐 특수한 효과를 줘서 그렇게 "찍히는" 것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때는 외운데로만 고르곤 하는 거다.

그 때 남반구 호주는 겨울이었다. 그리고 그 밤 허허벌판에서 내가 본 건 저 쪽 하늘과 내 뒤쪽 하늘 삼백육십도로 길게 하늘을 휘두르는 거대한 '진짜' 은하수였다. 드넓은 하늘엔 정말로 틈하나 없다고 여겨질 만큼 빈공간 없이 별들이 고르게 퍼져 있었다. 마치 고운 입자의 은가루를 흩뿌려 놓은 듯이. 그리고 그 큰 하늘을 일관성있게 휘도는 별의 강이 있었다. 얇은 옷을 입고 머리까지 멍해져 오는 찬 기운 속에서, 버스를 옮겨 타느라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약간 뒤로 하고 한참 동안을 고개를 들어 올리고 서있었다. 작은 성운도 보았다. 사진처럼 조명쇼는 아니었지만 신비한 빛을 띤 뿌연 형상이 눈에 띄었을때, '아, 성운이구나' 했다. 아주 멀리 별이 뭉쳐서 각자의 빛을 발하기 때문에 저렇게 뿌옇게 보인다고 했어. 마치 구름처럼. 그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랜 옛날 고대인들이 보았을 밤하늘이 이거와 같은 거였을까. 들판의 그 차고 청명한 공기가 뺨에 와닿는 느낌, clear 그 자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깨끗하고 선명한 하늘, 시야를 온통 가리는 은별빛밭. 그 시각 내가 서있던 그 먹먹한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내 눈과 뺨과 손과 온몸에 기억되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

*여행기는 몇장 쓰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기억속에서 사라져버리기 전에 이렇게 생각날 때라도 단편적으로 써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써본다.
2004.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