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 할아버지 "이흥규"씨 (뒤늦은 SOS를 시청하고)

사람이 어떻게...
양심도 없느냐..

라는 당연한 말이 어떤 경우에서는, 몇몇 경우의 상황에서 통용되지 않을 수 있다.

발길질을 해대는 주인이라는 사람, 그리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에 털끝만큼의 잘못도 느끼지 못하는 그 사람의 부인, "그걸 알아서 뭐하시려구요"라고 일관, 방관하는 동네 사람들, 나라의 녹을 받아먹으면서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조차 망각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라는 사람.

이건 "그 사람들, 아주 나쁜 사람들이야" 라고 얘기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윤리의식까지 갈 것도 없고,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몰이해의 문제이다.
선과 악의 문제, 혹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 혹은 몰이해, 이성의 문제인 것이다.
"인권"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자체를 아주 모르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하니까, 예전에는 다들 그래왔으니까, 다른 동네 사람들 모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는 문제니까 나도 내버려 두지뭐...' 하는 생각으로 50년을 지나쳐 왔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인 할아버지는...
바보같이 순박하기만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을 지 모른다. 50년 전에는 돈이 없어 오갈데 없는 청년이 잘 사는 사람에게 얹혀 살면서 부림을 당하고 거처를 제공받는 등의 일이 팽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방식대로라면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자신에게 행해지는 대우가 부당함을 깨달았어야 하고,
그걸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어야 하고, 관철되지 않았을 때 반항정도는 했어야 한다.
내가 제공하는 노동력에 비해 제공받는 재화는 터무니없이 적다. 당신이 나를 부리긴 하지만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시대가 변해서 내가 더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등등 말이다.
베란다 쓰레기 통 옆에서 앉을 곳 하나없이 쭈그리고 먹는 식사에 기대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학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상황에 점점 익숙해 져 갔을 것이고,
상황이 지속되면서 자신에 대한 존엄감을 잃어가고 오랜 학대로 인한 정신적 손상으로 진행됐음이 뻔해보인다.
그리고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폭력이 그를 옭아맸을 것이다. 가엽게도 그에대한 "공포"가 오히려 그 지옥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실수 있으세요, 누가 할아버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요."
- 흐르는 눈물

보는 내내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 화만 치밀어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대다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울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말도 없이 한 줄기 눈물만 흘릴 뿐인데,
나는 진짜로 '슬퍼져' 울었다.
이전까지는 50년의 학대끝에 할아버지는 약간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스스로의 상황에 대한 비관이나 통탄도, 분노, 슬픔조차도 느끼지 못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노인복지전문가의 따뜻한 이 한마디 말에 할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은 그 분이 그저 표현할 수 없는 상황때문에 모든 걸 묻어두고 있었을 뿐, 감정들은 생생히 느껴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지하게 슬펐다. 그 분이 그 모든 암담한 감정을 느끼지 못해 왔다면 나는 그냥 화만 나고 말았을 것이다. 느낄 수 있었으나 다만 조용하셨을 뿐이란게 참으로 가슴 아팠다.

"누가 제일 보고 싶으세요?"
"친아주머니가 보고싶어요"

"누님 보고싶지 않으세요?"
"안 봐도 괜찮아요"

50년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발음하는 가족들의 이름. 그의 지난 세월이 온전하게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거대한 조직이 다수를 무참히 짓밟는 횡포는 역사속에서 많이 보아왔다. 전쟁, 인종 학살, 나치즘, 식민정책 등등 말이다.
군중의식 속에서 인간존중의 윤리가 얼마나 휴지조각같이 그 빛을 잃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경계대상 1호다.
그런데 그런 거창한 군중의식이 아니더라도 집단적 '무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 역시도 '뭐, 저 사람들은 원래 그냥 그러려니'하고 무심히 지나쳤을 그 마을 사람들의 한 명이었을 수 있다. 그 사실이 무서워진다.

정신을 예리하게 닦아 놓을 필요가 있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나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절대 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청소년기 시절 학교 교실에서 목격했던 폭력의 현장과,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목소리를 내어 이 폭력이 부당함을 말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충격이후로 내 정신은 점점 더 무뎌져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일은 어른이 되었음에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쉬쉬하는 모양새였다. 가해자가 꽤 영향력있던 존재였을 것이다.
오히려 두둔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 소리없이 암암리에 진행되는 추악도록 못생긴 여론에 치를 떨었었다.
아무 말없이 듣고만 있는 내 자신이 싫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유년기의 관문이 아니었나 한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세상물을 먹은 걸까, 아님 더 많이 자랐던 걸까. 이때 일에 관해 다음에 기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더이상 무뎌지지 않도록 다잡고 싶다. 절대 방관자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