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등반(2010.8.14)

한라산 등반은 나름 의미("한계에 도전한다!" 정도의 평범한 의미)는 있었지만,
그것 외에 큰 재미는 못 느꼈다.

마치 속살을 보여주듯 안개에 휩싸여 있다 감질맛 나게 살짝 내보여 주는 신비의 백록담을 목격했다는 것이 종일 한라산 등반 후 가장 크게 뇌를 지배하는 기억이다. 마치 실재가 아닌 듯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해발 1950미터의 나무 없는 들판의 풍경도 또한 그랬다. 마치 유령처럼 수시로 형체를 바꾸며 산등을 쓸어대는 안개. 길다란 풀더미는 금방 햇빛에 금색으로 반짝이다가도 금방 안개 밑에서 진녹색으로 풀이 죽곤 했다.

그리고 2등을 꼽는다면, 발바닥을 무겁게 괴롭히는 통증을 애써 모른척 해가면서, 미친 듯 학학대면서 정신없이 하산하다가 주저 앉았을때, 사위를 감싸던 적막이 기억에 남는다. 산속에서 홀로 앉아 보는 것,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아쉬울 정도로 멋진 경험이다. 제주 산속의 식생은 산을 잘, 아니 전혀 안 다니던 나조차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육지의 그것과는 참 다르다. 나무 밑을 온통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낮게 자라는 산대나무, 지긋지긋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돌길과 그 돌 위에 핀 작고 푸른 이끼, 싱그러운 푸른 햇빛을 투과하는 둥근 잎사귀를 매단 이름모를 나무들, 그리고 마치 스프레이처럼 서늘한 안개비를 뿌리는 유령같은 안개 안개 안개. 거기다 몸을 숨긴채 역시나 서늘하게 숲을 울리는 까마귀 울음.

이렇게 회상하다보니 처음에 재미를 못 느꼈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어질 정도로 돌아가고 싶다. 하핫

아 그 모든 번거로움과 번거로움 넘어선 등산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뇌는 기억을 재정비하여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만을 편집해 두었다.  '이 놈의 백록담은 구름속에 머리를 처박았나, 두고보자 백록담' 그러면서 중얼중얼 욕을 하며 올라갔었는데. 그리고 진짜 구름에 처박힌 듯 안개에 휩싸인 백록담을 보면서도 절대, 결코 "다시 와야겠어" 따위의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정말 노루와 신선이 함께 놀 법할 정도로 옛날 전래동화책에 나오는 삽화처럼 예뻤으나 발의 고통이 너무 컸으므로) 그런 것들은 싹 잊어 버리고서 그 풍경을 회상하며 그 곳에 없음을 아쉬워하다니. 주말마다 등산하는 산중독자들을 약간 이해할수 있을 법도 하다.

아, 그리고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산을 오르 내리던 내 곁을 스친 수많은 중년 부부도 생각이 난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괜찮아?"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 뿐인데도 그 속에 담긴 진심의 따뜻함은 옆에서 그냥 함께 듣는 사람한테도 전달이 되더라. '행복한 가정', 혹은 적어도 '행복한 부부'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망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여행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냥 담담하게 자신들의 인생을 쪼개어 내가 아닌 우리로 존재하는 자들을 목격한다. 마치 별 일이 아닌양,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평범하게 그들은 곳곳에 있다. 수십년을 지속해 온 그들의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관계에 경외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