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정리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자유로웠다.
홀로 여행했으므로 동행자와 시간,일정에 대해 상의할 일도 없었다. 매일 기상을 몇시에 할지에 대해서도 정해둘 필요가 없었다. 그냥 '되도록 일찍' 정도면 충분했다. 버스 스케줄과 같은 교통편도 체크할 필요가 없었다.
매일 일어나 짐을 스쿠터에 싣고, 대충 앞에 남은 도로의 모양새를 체크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숙소도 정해두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준성수기에 그러면 위험할거라 얘기했으나, 내일의 숙소를 미리 정해두고 '내일 반드시 거기까지 가야해'하는 마음가짐이 생길까봐 그게 싫었다. 덕분에 어느 날은 주변 게스트하우스가 모두 예약 full 상태라 전날 묵었던 곳에서 다시 묵는 일도 있었으나, 그래서 공식적인 그날의 이동거리는 결과적으로 0Km였으나, 덕분에 성산항에서 해질 무렵의 풍경을 찍으며 나름 한가로이 멋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처없이 떠돌다 맘에 드는 해변이 나오면 몸을 담궜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누군가 검은 돌로 낮게 둑을 쌓아 두었다. 그 위에 올라가 누웠다. 파도가 칠때만 물이 올라와 내 등을 적신다. 불쌍한 고둥같은 생명들을 데려다가 괴롭히며 놀기도 하고, 작은 게도 건져주었다. 물에 몸을 담그면 손바닥만한 물고기들을 슝슝슝 빠른 속도로 지나다닌다.(종달리 해안도로 해녀박물관 인근 해변)

-계획없이 기약없이 떠도는 여행길에 반갑지 않은 태풍이 찾아왔다. 비가 몰아쳐 시야가 가리고 바람은 마치 스쿠터채로 나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새라 지도에 써있는 이름 넉자만 보고 제주 현지인도 목격한 이가 많지 않다는 '엉또폭포'를 찾는다. 내비게이션도 없었고, 나름 로드맵이라는 지도에 도로의 표기도 정확하지 않다. 서귀포시 곳곳에 엉또폭포 여기로라는 화살표를 써붙여놓지도 않았다.(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바람 몰아치는 도로,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야 할지 우회전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상황. 운에 맡기기를 반복하다 어찌어찌 엉또폭포 초입을 찾아낸다.

마치 구름 천장에 담아놓은 물탱크가 터진듯 우렁차게 쏟아내리는 물줄기. 제주 그 어느 폭포보다도 최고로 멋있었으나, 그리고 그 폭포로 가는 산책길에 만났던 제주 청년이 "제주 살멍 이 폭포를 처음 보네요" 하며 찬탄을 하였지만 내게 더 기억에 남는 건 그곳에 닿기까지 과정이 되었다.

-여행길의 진정한 묘미는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닿기까지 과정이라 했던가. 그게 진실이라면 스쿠터는 그 과정을 황홀하게 만끽하게 해주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
길 자체의 아름다움을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찬양했을까. 아마도 제주도에 와 본 사람들이 아닐까. 몽글몽글 솟아났다가 엷게 베일처럼 퍼지는 구름과 에머랄드 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해안도로는 말할 것도 없다. "목장"에 대한 동경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길도 잘 읽을줄 모르던 둘째날 찾아간 이시돌 목장 가는 길에 맛 본 중산간 도로. 하늘과 바다의 푸른 색, 눈 닿는 곳마다 펼쳐진 초원의 녹색, 파도의 새하얀 포말, 구멍 송송 난 새까만 돌로 이루어진 이 네가지 색깔의 조합은 제주의 상징처럼 뇌리에 박혔다. 그냥 멍하니 시야에 들어오는 눈부신 풍경을 보며 달리다가, 어쩔수 없이 가다 서고 가다 서고를 반복해야 했다. 겨우 3-40Km의 속도인데도 이 길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레를 걷는 것일테다. 걸었던 코스를 또 걷는 사람도 봤다. 아마 걸으면서도 그들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걸어서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깝다고.

-나름 지도를 보며 대충 계획을 세우기는 했으나 그 계획대로 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다. 지도에 그려진 이 길대로 가야지했으나, 어느새 알수없는 곳으로 접어들고 내가 어디있는지 알수 없는 상태가 되는 일들.(초기에 더 많았다.) 제주에는 차가 잘 다니지 않는(나름 성수기인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펼쳐진 직선도로가 많이 있다. 어느 도로인지 알수 없는 어떤 도로에서 나의 앞 뒤로 끝없이 지평선까지 이어진 직선도로가 펼쳐져있고 나는 홀린 듯 스쿠터를 멈춘다. 그러면 스쿠터의 엔진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키를 돌려 시동을 끄면 주위는 완벽한 적막에 휩싸이고 그 길게 이어진 도로는 오로지 나만의 도로가 된다.

-태풍이 상륙한 그 날 밤, 나는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날 아침에 서귀포 민중각에 예약한다고 했으나, 알수 없는 다른 곳에 전화걸어 예약했나 보다. 바람은 거세져가고 사위는 어둑해져가는데 민중각에선 예약사항이 없다는 답변을 받는다. 그리고 역시나 Full이란다. 비바람 속에 글라라게스트하우스까지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갈팡질팡인 머리속을 하고 계속 달렸다. 그리고 마치 신의 계시처럼 곁눈으로 "한라여인숙" 간판을 본다. 이상한 곳이면 어떡하나 하고 문을 열었을때, 겉으론 퉁명하나 속은 친절한 전형적인 제주 아줌마가 나온다. 비옷입은 처자가 짐을 갖고 오겠다고 하고 나가는 걸 의아한 표정으로 보더니 내 스쿠터를 보고 비바람속에 그냥 달려온다. "아유, 이 비속을 달렸어?"하며 옷 젖는 것도 모르고 스쿠터 세우는 걸 도와준다. 그리고 마침내 작지만 아늑한 그 방에 안착했을때의 기분이란 참.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여행의 묘미란 바로 그런 것에 있는 것 아닌가. 낯선 곳에서 벌어지는 비예측성 사건들.

-별로 많지 않은 여행경험이지만, 제주를 다니며 이때까지 내가 해외에서 보았던 것들이 나름 다 있지 않나 싶었다.
화순금모래해변의 하일라이트는 사실 그 금모래사장이 아니라 바다를 면했을때 오른쪽으로 이어져있는 기이한 바위돌들이다. 제주치고는 독특한 검은돌이 아닌 약간 붉은기가 도는 바위들이 마구 엉켜있어 여기로 갈수있나 의아했는데, 올레길 표지때문에 믿고 따라갔다. (경험에 의하면 멋진 풍경을 간직한 곳에는 어김없이 올레길 표지가 있었다.) 마치 우주선같이 떡 엎어진 산방산을 배경으로 제법 길게 이어진 바위들의 모습은 참 이런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있다. 규모면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호주 중심부의 킹스캐년에서 본 협곡의 지층을 연상케 했다.
협재해수욕장의 물빛은 엘니도나 피피섬에서 본 것과 비슷한 환상적 야광색이다. 그리고 송악산, 산방상, 산굼부리의 연두빛 초원도 역시 호주에서 본듯한 미지의 들판과 같은 모습. 삼나무숲길의 일직선으로 빽빽하게 뻗은 숲은 가보진 않았지만 북유럽의 숲이 연상된다.

-왜 사람들이 자신의 스쿠터에 이름을 붙이는지 의아했으나, 이름없던 나의 스쿠터와 헤어질 무렵이 되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태인지 대충을 알만해지니 반납해야 했던 내 스쿠터. 7박8일 남들은 징하게 오래있다 오는구나 했으나 나는 또 아쉬워서 가슴 한켠이 먹먹했다. 다음 번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다시 와야지. 그래서 그옛날 나그네처럼 그냥 걸어야지. 놀멍 쉬멍 그냥 걸어야지.

<일정을 키워드로 정리>
2010년 8월 21일 토요일 : 아침 출발, 12시 제주공항 도착, 바이크루에서 스쿠터를 빌려 강습받고 약 2시 반경 출발, 용두암, 용두암 근처에서 해물뚝배기 먹음, 용담해안도로, 이호해수욕장, 정글게스트하우스 묵음
8/22(일) : 아침, 정글게스트하우스 옆 한담해안산책로(여기 정말 대박), 한림해안도로, 한림항, 협재해수욕장(해수욕!), 협재해수욕장 옆 식당 된장찌개 대박ㅠㅠ, 이시돌목장, 오설록, 추사적거지, 송악산마라도유람선선착장, 형제해안도로(모든 해안도로중 최고), 산방산게스트하우스 묵음
8/23(월) : 산방산, 산방굴사, 송악산 전망대까지 산책(여기서 마리를 만나다!), 화순금모래해변, 대평포구(여기서 비를 피하다 늙은 개를 만나다.), 용왕난드르식당에서 보말수제비 먹음, 박수기정, 중문입성, JJ게스트하우스 묵음
8/24(화) : 천제연폭포, 하얏트 호텔 뒤편으로 쉬리 언덕 지나, 중문해수욕장 내려가는 길 나무데크로 된 산책로 감동, 주상절리대, 제주월드컵경기장, 엉또폭포, 외돌개, 한치물회 저녁, 한라여인숙 묵음,
8/25(수) : 천지연폭포, 이중섭미술관, 이중섭거주지, 게짬뽕, 정방폭포(해변에 바로 폭포가), 쇠소깍, 남원큰엉, 표선해안도로, 김영갑갤러리 두모악(ㅠㅠ), 신산해안도로,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그냥 지나쳐) 시드게스트 하우스 묵음(멋진 젊음들을 만나다.)
8/26(목) :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올인하우스, 섭지코지해변, 섭지코지해변, 성산항으로 가서 우도행 배를 탐,(잠시 동행인이 생김, 사진들 고마워요) 우도, 우도를 나와서 성산항에서 놈, 시드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감
8/26(금) : 성산해안도로, 종달리해안도로, 해녀박물관 인근 해변에서 물놀이하고 놈, 행원리 풍력발전 마을, (이 인근에서 또 바다에 빠졌다가 막 나오는 듯한 개를 만났는데, 그새 친해졌다고 스쿠터에 시동을 걸자마자 낑낑대더니, 잠시 동안이지만 개가 앞장서서 같이 달렸다. 와 도로는 뻗어있고, 개가 앞서 달리고 멋진 광경. 언젠가 큰 내 개가 생기면 또 해봐야지.) 만장굴, 비자림, 산굼부리, 삼나무길, 사려니숲길, 제주입성, 팡라오게스트하우스 묵음
8/27(토) : 한라산 등반, 백록담, 제주공항, 김포공항, 집으로 돌아옴